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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덧글 0 | 조회 5,888 | 2014-12-06 06:56:49
안재욱  

나는 꿈을 꾸었죠. 네모난 달이 떴죠.

 하늘 위로 올라가 달에게 말을 했죠.

 늦은 밤 잠에서 깨어 날개를 흔들었죠.

 오리는 날 수 없다 엄마에게 혼났죠.

 이제는 하늘로 날아갈래요.

 하늘 위 떠 있는 멋진 달 되고 싶어.

 -체리필터 ‘오리 날다’ 중에서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를 듣다 보면 갈매기 조나단이 떠오른다. 조나단과 오리의 비행이 서로 닮아서일까? 갈매기나 오리나 날개를 가진 날짐승이어서 날아오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 둘의 ‘날기’는 다른 갈매기나 오리들과는 달라 보인다. 갈매기 조나단은 먹이를 찾기 위해 날지 않는다. 또 ‘오리 날다’의 오리는 비록 퇴화되었지만 날개를 지닌 조류의 본능을 되찾고자 한다. 1차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비행’이 아니라 ‘열망의 비행’이라는 점에서 둘은 참 닮아 있다.

 ‘갈매기의 꿈’은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바크가 1970년 발표한 우화소설이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처럼 전직 비행사였던 작가가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실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일생을 통해 모든 존재의 초월적 능력을 일깨운 우화 형식의 ‘신비주의 소설’이다.

 1973년 1월 리처드 바크의 우화소설 ‘갈매기의 꿈’이 국내에 처음 번역돼 나왔을 때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었다. 3년 먼저 이 책을 펴낸 미국에서도 신화적인 판매 기록을 낳았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바크는 비행사로서 3000여 시간의 비행 기록을 갖고 있다. 공군 복무를 마치고 자유기고가로 새 출발한 바크는 처음에는 비행 관련 잡지의 편집에 참여했으나 나중에는 소설가로 변신,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음 했다.

 리처드 바크는 어느 날 밤 해변을 걷다가 홀연히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소리와 함께 강한 영감을 받고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조나단 리빙스턴이란 갈매기를 주인공으로 한 ‘갈매기의 꿈’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조나단, “먹기 위해 날고 싶지 않다”

 

 모든 갈매기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떼지어 몰려다닌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날아다닌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행속도나 비행고도가 아니다. 먹이만 잘 잡을 수 있다면 날지 않고 기어다녀도 전혀 상관없다. 하늘을 멋지게 날아오르는 것보다는 먹이를 얻어먹기 위해 뱃전에서 퍼덕거리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갈매기들의 날기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비행에 머물러 있다.

 갈매기 조나단은 다르다. 그는 갈매기로서 단순히 본능적인 먹이의 확보가 아닌, 비행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난다. 다른 갈매기들처럼 바닷가의 쓰레기더미를 뒤지지 않는다. 선창가나 고깃배 주위를 맴돌면서 어부들이 먹다 버린 빵 조각을 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생활을 거부하는 것이다. 갈매기들은 해변에서 조금 날아 겨우 먹이를 찾은 다음에는 또 제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다시 먹이를 찾곤 했다. 그것이 갈매기들 인생의 전부였다. 그 갈매기들에겐 새로운 꿈이 없었다.

 먹고 사는 데에만 집착하는 삶에 회의를 느낀 조나단은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완성과 초월’을 향해 ‘비상의 꿈’을 꾼 것이다. 조나단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바라볼 수도 있어.”

 그러나 친구들과 부모형제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조나단은 결국 갈매기 집단으로부터 떠나야 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쓸데 없는 고생을 자초하느냐는 친구들과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한다.

 조나단은 빠르게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오르려 한다. 그는 비행에 미쳐 있다. 날개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날개로 얼마나 빨리 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날개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끝을 보고 싶다. 자신의 날개가 가진 극한의 한계까지 가고 싶어 한다. 조나단의 ‘날기’는 시험이며 도전이며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비행이다.

 

 ‘먹는 것’과 ‘나는 것’의 차이

 

 조나단의 부모 역시 여느 부모들처럼 조나단이 다른 갈매기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랬다. 갈매기들에게 평범한 삶이란 열심히 먹고, 살이 쪄서 새끼를 낳고 오래오래 사는 것일 게다. 삶의 의미는 오로지 그런 것이다. 그들의 날개는 먹이를 찾기 위한 실용적 비행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유용할 뿐이다. 생존과 번식 이외의 목적으로 비행하는 것은 에너지만 낭비할 뿐 어떤 이득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이다. 날개에 어떤 다른 이상을 얹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탐구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조나단의 비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먹기 위해’ 나는 것에 안주할 수 없었던 갈매기 조나단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완성과 초월’을 향해 비상의 꿈을 꾼다. 피나는 자기 수련을 통해 조나단은 꿈을 실현해 나간다. 먹는 것은 모든 동물의 1차적 본능이다. 동물은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생존본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한 동물은 먹어야 한다.

 나는 것은 이상의 실현이다. 예술적 행위다. 인간은 1차적 욕구를 실현하는 것에만 머물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서가 결코 아니다. 문명을 건설하고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인 것이다. 날기는 생존의 욕구 이외에 인간이 문화적 욕구를 실현하는 의미 있는 몸짓이다. 날기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 행위의 상징인 것이다.

 마침내 꿈을 실현한 조나단은 자기 만족에 그치지 않고 동료 갈매기들을 초월의 경지와 그것에 도달하는 길로 이끌기까지 한다. 작가는 인간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초월적 능력을 스스로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누구나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 그리고 ‘완전한 속도’

 

 “치앙, 여기서는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요?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하늘이라는 곳은 없는 것인가요?”

 “없단다, 조나단. 하늘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또 어떤 시간도 아니지. 하늘이란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거야. 조나단, 네가 완전한 속도에 이르는 그 순간, 너는 하늘에 닿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그것은 1백만 킬로미터로 혹은 빛의 속도로 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모든 숫자는 하나의 한계이고, 완벽한 상태란 한계가 없는 것이니까.”

 조나단의 스승 치앙은 갈매기 조나단에게 ‘완전한 속도’에 대해 말한다. 완전한 속도란 무엇일까? 완전한 속도란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없는 상태의 속도를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속도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버린다. 속도로 이름 붙여질 때 이미 그것은 현실적 제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속도’는 ‘한계가 없는 속도’이다. 어떤, 무엇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다. 인간은 아직 빛의 한계에 머물고 있다. 인간은 빛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빛의 세계에 갇혀 있다. 완전한 속도는 생각의 속도와 같다. 조나단의 질문에 치앙은 말한다. 완전한 속도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는, 원하는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이라고…. 완전한 속도는 한계가 없는 자유로움 그 자체다.

 속도만이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지는 않았다. 인간에게 한계는 육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적 영역에서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경우를 오히려 더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며 진화해왔다. 만약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아니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어버렸다면 만물의 영장이 되지 못하고 멸종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여타의 생물체가 갖지 못한 사유능력을 가졌으며,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다스리는 지식을 축적하고, 후손에게 교육시켜왔다. 동물과 같이 반복적 학습에 머물지 않고 두뇌를 발전시켜 지혜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인간은 최초로 주어진 한계를 극복했고 다시 다른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지금도 인간은 아직 넘지 못한 또 다른 한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넘어서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 만든 구속·굴레에서 벗어나야

 

 자유란 무엇인가? 타인의 강압에 의한 외부적 강제를 없애는 것만을 자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인간은 더 나아가 스스로 규정짓고 가두는 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구속하고 스스로 굴레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 굴레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완전한 속도에 다다르게 된다.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할 때의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빌리는 “시작할 때는 몸이 약간 뻣뻣해지지만…막상 춤추기 시작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안 느껴지고…그래요, 마치 내가 공중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내 몸 안에 불길이 치솟고 난 거기서 날아가요. 마치 새처럼요. 마치 전기처럼요…그래요. 그건 전기 같아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비상한다.

 우리는 갈매기 조나단처럼, 그리고 빌리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완전한 속도에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 어디에건 다다를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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